연수구 아카이브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연수의 역사를 기억합니다.

역사와 인물

비류(沸流, BC?~BC?)

미추홀의 시작, 문학산성

비류(沸流, BC?~BC?)

졸본부여의 왕자, 해상왕국을 꿈꾸며 미추홀국을 세우다
새롭게 탄생한 고구려에서 촉망받던 왕자 비류는 동생 온조와 어머니 소서노와 함께 정든 고향 졸본 땅을 버리고 남쪽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고주몽이 북부여에서 예씨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았던 아들 유리 왕자가 찾아와 왕권이 그에게 넘어가게 되었기 때문이지요. 이들이 눈물을 삼키며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사실 조금 더 복잡합니다. 약 20년 전 이상으로 올라가야만 제대로 알 수 있답니다.

북부여에서 도망 나와 쫒겨 다니던 위기의 남자 고주몽을 수용하여 졸본부여의 2인자로 키웠다가, 왕권을 물려준 사람이 누구입니까? 압록강 중류 지역을 기반으로 중개무역을 하던 졸본부여의 왕 연타발이지요. 연타발의 딸이자, 고주몽의 아내가 된 소서노는 연타발로 하여금 고주몽을 후계자가 되도록 도울 뿐 아니라, 고주몽을 적극적으로 도와 강한 나라 고구려를 탄생시키게 됩니다. 졸본부여의 토착세력들과, 활 잘 쏘고 말 잘 타는 고주몽 세력이 합쳐진 고구려는 동서남북으로 확장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구축하게 되지요. 이때 왕자인 비류와 온조도 나라를 통합시키고, 왕권을 강화하는데 큰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왕자 비류는 당연히 고구려의 제2대 왕으로서의 준비를 하고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토사구팽이 발생합니다. 졸본부여 세력들을 활용하여 고구려을 세우고 키운 고주몽은 나라가 성장하자 비류를 왕으로 세우지 않고, 북부여에서 찾아온 유리 왕자에게 왕권을 넘긴 것입니다. 왕권이 유리에게 넘어가자 비류와 온조는 큰 위기를 맞게 되는데, 이것은 유리 왕자를 중심으로 한 북부여 세력이 졸본부여 세력을 숙청하려 했음을 의미합니다.

비류와 온조 형제는 어머니 소서노와 함께 많은 무리를 이끌고 졸본부여를 떠나 한강유역에 도착합니다. 부아악(북한산으로 비정)에 올라 사면을 조망한 무리들은 어디에 정착할 것인가를 두고 심각한 토론을 벌인 것으로 보입니다. 대부분의 신하들은 온조와 함께 한강유역인 위례성(송파 풍납토성 일대, 혹은 위례 지역으로 비정)에 도읍할 것을 적극 주장합니다. 한강 주변으로 비옥하고 풍요로운 땅이 드넓고, 동서남북에 높은 산들이 천연적인 방어막을 만들어 줄 뿐 아니라, 한강을 통해 황해바다로 진출할 수 있는 최적의 도읍지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비류는 신하들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비류는 바닷가에 나라를 세울 것을 계속 고집했고, 온조와 신하들은 한강 남쪽 위례성 일대에 집착하여 결국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됩니다. 비류는 함께 내려온 신하들이 강력히 추천했던 한강 유역을 온조에게 양보하여 십제를 세우게 하고, 자신은 문학산 일대인 미추홀(彌鄒忽)에 나라를 세움으로써, 인천 역사에 가장 먼저 이름을 올리는 인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비류는 새로운 나라 건설에 실패합니다. 삼국사기에는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나라를 성장시키는데 어려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미추홀에서 제대로 나라를 일으키지 못한 비류가 온조에게 와보니 온조의 나라가 안정되게 잘 성장하는 것을 보고 후회하며 죽습니다. 결국 비류의 신하들과 백성들이 온조에게 합류하여 부여씨의 백제를 건국하게 됩니다. 이때가 BC18년입니다.

우리는 비류가 왜 많은 신하들의 간청을 뿌리치고 인천 땅에 나라를 세우려했는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온조보다 형이었고, 당연히 기득권을 주장할 수 있는데 말입니다.

비류는 황해바다를 경영하는 해상왕국을 꿈꿨던 것입니다. 동아시아의 지중해라고 불리는 황해는 다양한 문화과 융합되는 경제적 외교적 소통공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졸본부여에서 압록강을 장악해 중계무역으로 나라를 키웠던 비류는 이제 더 넓은 ‘문명의 고속도로’였던 황해바다를 통해 새로운 해상왕국을 건설하려 했던 것입니다. 천연의 요새인 문학산을 뒤로 하고, 소금을 비롯한 풍부한 자원의 보고인 갯벌을 활용하고, 인천 앞다다 경기만의 180여 개의 섬들을 징검다리 삼아 황해안 네트워크를 구상했을 것입니다.

소서노(召西奴 BC.66~6)

소서노(召西奴 BC.66~6)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를 세운 국모
단재 신채호 선생은 [조선상고사]에서 “소서노는 조선 역사상 유일한 창업 여대왕일 뿐더러,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를 세운 사람”이라며 극찬하고 있습니다. 소서노는 아마도 우리나라 역사에 등장하는 여성 중 가장 적극적이며 진취적이고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던 사람 중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서노는 졸본부여의 왕인 연타발(延陀勃)의 딸로서 북부여왕 해부루(解扶婁)의 서손(庶孫) 우태(優台 )와 혼인하여 비류와 온조를 낳았다고 합니다. 일설에는 소서노가 고주몽과 혼인하여 비류와 온조를 낳았다고 전해지지요. 어느 설이 맞는지 확인이 쉽지 않지만 분명한 것은 소서노가 우태가 죽은 뒤 한동안 졸본에서 과부로 살았다는 것과, 부여를 탈출하여 엄리대수를 건너온 주몽과 재혼하였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주몽을 도와 연타발의 왕위를 계승하게 하고, 나라를 새롭게 고구려로 재탄생시켰다는 점과 그 아들들인 비류와 온조도 고구려 건국과정에 함께 했다는 것입니다.

압록강 중류와 비류수 일대의 강줄기를 장악하고 중계무역으로 기반을 잡았던 졸본부여의 왕인 연타발은 동부여 금와왕의 아들들에게 쫒겨 새로운 땅을 찾아온 젊은이 고주몽과 그 일행을 받아들입니다. 백발백중의 용사요, 비범하고 야망이 큰 고주몽은 연타발의 나라를 방어하고, 키우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겠지요. 그리고는 과부로 지내고 있던 자신의 딸 소서노와 결혼시켜 사위를 삼습니다.

물론 소서노가 먼저 고주몽을 만나고 후에 아버지에게 소개하여 전격적인 결합이 이루어졌을 수도 있고, 연타발이 고주몽을 범상치 않게 보고 자신의 딸을 시집보냈을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소서노가 고주몽과 함께 새로운 나라 건설에 적극 나섰다는 것입니다.

고주몽에게는 동부여를 도망 나올 때 함께했던 오이, 마리, 협보 등 세 부하와 도피과정 중 모둔곡에서 만난 재사, 무골, 묵거 등 여섯 사람이 자신을 지탱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고주몽에 대한 충성이 남달랐고, 지혜로왔습니다. 연타발이 맡기는 일들을 잘 수행했고, 신임을 받기에 충분하게 행동했습니다. 결국 왕과 졸본부여의 백성들에게 신임을 받고, 연타발의 왕위계승자로 결정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연타발의 딸이자 주몽의 아내가 된 소서노입니다. 소서노는 누구보다도 주몽의 비범함을 알았고, 20대의 젊은이 고주몽을 키워준 큰 그릇의 여성이었습니다. 소서노가 없었다면 고주몽이 졸본부여에 정착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며, 왕위계승은 물론 고구려 건국은 꿈도 꿀 수 없었을 것입니다.

소서노는 연타발이 가진 넓은 영토와 재물과 사람들을 아낌없이 고주몽의 왕위계승과 고구려 건국에 사용했습니다. 소서노는 이질적인 집단인 고주몽 세력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무마시키고, 재물과 땅으로 회유하면서 주몽의 사람들로 만들어 갔습니다. 비류와 온조도 어머니 소서노를 도와 BC 37년 고구려가 창업되도록 했으며, 그 후 고주몽의 왕권 강화에 기여했습니다. 고주몽은 이들 세 사람의 도움을 받으며 내부적 안정을 이루어 나갔고, 주변의 말갈을 물리치고 불류국(비류국), 행인국을 복속하는 등 영역을 넓히고, 주변의 위혐 요소를 제거해 나가며 나라와 왕권의 강화시켜갔습니다.

그러나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혼인한 예씨(禮氏)의 소생 유리(類利)가 고구려로 와서 태자로 책봉됨에 따라, 왕위계승권을 잃어버린 비류와 온조가 새로운 국가의 건설을 위하여 남하하여 나라를 세우게 됩니다. 소서노는 아들들과 남하하여 백제 건국을 돕고, 온조왕 13년(서기전 6) 61세로 생을 마감합니다.

비류(沸流, BC?~BC?)

김수로왕의 부인 허황옥의 묘

허기(許奇)

당나라 황제의 성씨를 받아온 신라의 외교관
허기는 가야 김수로왕과 부인 허황옥(許黃玉)의 23세 후손인 가야 왕족으로, 신라 경덕왕 때 6두품의 아찬(阿粲)이었습니다. 허 씨인 허기가 어떻게 김수로왕의 후손인지 의아하시죠? 김수로왕의 부인인 허황옥(許黃玉)은 아유타국에서 온 공주였는데, 수로왕과 결혼하여 10명의 아들을 낳습니다. 그 중 장남인 거등은 왕통을 이었구요, 허왕후는 김수로왕에게 자신의 흔적을 남겨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해서 둘째와 셋째가 왕비의 성인 ‘허 씨’ 성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허 씨들은 가야의 왕족으로 가야의 중심세력이었다가 신라 진흥왕 때 신라에 병합되었으므로, 6두품의 귀족으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허기는 경덕왕 15년(755년)에 당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됩니다. 그는 다음 해인 756년에 발생한 ‘ 안록산의 난’으로 인해 귀국하지 못하고, 당나라의 황제인 현종(玄宗)이 촉(蜀)으로 피난길에 있을 때, 황제를 호위하게 됩니다. 난리가 평정된 후에 허기는 그 공을 인정받아 황제의 성인 이(李)씨 성을 하사 받고 758년에 귀국합니다. 경덕왕은 그를 크게 칭찬하며 미추홀 땅을 주어 소성백((邵城伯)에 임명했다고 하지요. 이렇게 해서 인천 땅은 소성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고, 그 후손들은 문학산 주변인 지금의 연수동과 선학동, 문학동 일대에 자리 잡으며 큰 호족세력이 된답니다.

허기는 당 황제의 성인 이씨 성을 하사받은 것은 기뻤지만, 그 성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무척 고민스러웠습니다. 자신의 성인 ‘허 씨’는 허왕후의 흔적을 이어가기 위한 것인데, ‘이 씨’ 성을 사용하게 될 때는 그 성을 포기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결룩 허기는 이 씨와 허 씨 복성을 써서 이허기(李許奇)라로 쓰게 되었구요, 그의 후손들은 인천지역에서 호족으로 성장하며, 고려 현종 임금 때의 이허겸까지 10대를 이어왔는데 모두 ‘이허’라는 복성을 사용하게 됩니다. 그로 인해 인천 이씨들은 이허기를 득성조(得姓祖)로 여긴답니다.

이허겸(李許謙)

이허겸의 묘역

이허겸(李許謙)

인천이씨의 중시조, 연화부수지의 주인공
이허겸은 고려 8대 현종(顯宗 992~1031, 재위1009~1031) 때에 외척의 반열에 오른 인천지역의 호족입니다. 신라 경덕왕 때부터 인천 지역의 호족이었던 이허기의 10대 후손이지요.

이허겸은 안산 김씨 김은부(金殷傅)를 사위로 맞아 딸을 시집보냈습니다. 그런데 김은부는 거란의 침입 때 현종 임금을 잘 보필한 공로로 세 딸을 현종에게 시집보내는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이허겸의 외손녀인 김은부의 첫째 딸은 연경원주(연경궁주)가 되었다가 후에 원성태후(元成太后)가 되구요, 다른 두 딸은 원혜왕후와 원평왕후가 되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이허겸도 외척의 반열에 오르게 됩니다.

김은부의 첫째 딸인 원성태후는 고려 9대 임금인 덕종(德宗)과 10대 임금인 정종(靖宗) 을 낳았고, 둘째 딸인 원혜왕후 김씨는 고려 11대 임금 문종(文宗, 1019~1083)을 낳게 됩니다. 이렇게 되니 김은부는 세임금의 외할아버지가 되었습니다. 김은부는 추충수절창국공신(推忠守節昌國功臣) 칭호와 안산군(安山郡) 개국후(開國侯)의 작위와 식읍(食邑) 1천 호가 내려집니다. 이와 함께 세 왕비들의 어머니인김은부의 아내와 김은부의 장인인 이허겸의 위치 또한 급상승하게 됩니다.

현종은 원성태후의 어머니에게는 안산군(安山郡) 대부인(大夫人)을 추증하였으며, 1024년(현종 15)에는 외조부 이허겸(李許謙)에게 상서좌복야 벼슬과 상주국 훈위를 주면서 소성현(邵城縣) 개국후를 봉하고 식읍 1천5백 호를 주었습니다. 이허겸은 왕실의 외척 반열에 오르고, 세 임금의 외증조할아버지가 되어, 인천 이씨를 고려의 새로운 명문가문으로 부상시키게 됩니다.

이허겸의 묘는 연수동 584번지 경원대로 변에 위치한 까치섬 위에 있습니다. 이 곳은 풍수지리설로 볼 때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 곧 ‘연꽃이 물에 떠 있는 모양’이어서 어마어마한 명당이라고 합니다. 풍수가들은 고려시대 인천 이씨가 흥왕했던 것은 중시조인 이허겸의 묘가 명당 중의 명당이기 때문이라고 입을 모은답니다. 이허겸의 묘역은 상석과 봉분, 그리고 그 아래에 약간 떨어진 곳에 위치한 묘표와 문인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허겸의 묘 앞에는 풍수와 관련하여 석물이 없었고 까치섬 아래에 묘표와 문인석만 있었는데, 최근에 문중에서 묘를 단장하면서 묘에 병풍석을 둘렀답니다. 묘표의 크기는 너비 63㎝, 높이 145㎝, 두께 28.5㎝ 이며, ‘고려국상서좌복야 상주국소성백이공허겸지묘(高麗國尙書左僕射上柱國邵城伯李 公許謙之墓)’라고 쓰여 있답니다.

이자연(李子淵, 1003~1061)

이자연(李子淵, 1003~1061)

세 딸을 임금에게 시집 보낸 고려 전성기의 실력자
이자겸(李資謙 ?~1126)은 중서령(中書令) 이자연의 손자이자, 경원백(慶源伯) 이호(李顥)의 첫째 아들입니다. 여동생은 순종의 제3비였다가 순종이 죽은 후에 외궁(外宮)에 머물면서 노비와 간통한 것이 드러나 폐위된 장경궁주랍니다.

이자겸은 집안의 힘으로 관직에 나아가, 국가의식과 행사를 주관하는 정7품의 합문지후(閤門祗候)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장경궁주의 간통사건과 연좌되어 해임되었다가, 그의 딸이 예종과 혼인하여 연덕궁주(延德宮主)가 되면서 다시 일어서게 됩니다. 연덕궁주가 1109년(예종4)에 친정집에서 예종의 맏아들을 낳았고, 1114년(예종9)에는 왕비로 책봉됨으로써 이자겸의 힘은 더욱 커집니다.

1122년(예종17) 예종이 죽고 12살의 어린 왕자가 이자겸의 보필에 힘입어 즉위하니 그가 고려 제17대 인종(仁宗)입니다. 외손자인 인종의 왕권을 지키기 위해 왕권을 넘보는 예종의 동생들을 제압하면서, 이자겸의 정치적 위상은 더욱 높아지고, 조정의 모든 권력은 이자겸에게 집중됩니다.

이자겸은 또 자신의 권력을 더 강화하기 위해 자신의 셋째 딸을 인종의 왕비로 들여보내고, 얼마 뒤에는 넷째 딸마저도 인종의 왕비가 되게 합니다. 이렇게 되면 어머니의 동생들을 왕비로 맞게 되는 것이므로 인륜에 어긋나는 혼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 이외에 누구도 왕 주변에서 권력을 만들 수 없도록 하겠다는 이자겸의 뜻을 인종 임금은 물론 누구도 막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이자겸은 왕의 칭호만 없을 뿐 왕을 주무르면서 왕보다 더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습니다.

이와 같은 전횡은 인종임금으로 하여금 하루빨리 이자겸의 손아귀로부터 벗어나고픈 열망을 갖게 합니다. 1126년(인종4) 2월 왕은 이자겸 세력을 제거하려는 거사에 나서게 됩니다. 이를 위해서는 이자겸의 사돈이자 군사적 실세인 척준경(拓俊京) 일파를 먼저 제거해야 했습니다. 이들은 약속된 날 밤에 군사를 거느리고 궁궐로 들어가, 우선 척준경의 동생인 병부상서 척준신(拓俊臣)과 아들인 내시 척순(拓純) 등을 살해하게 됩니다. 변란을 알게 된 이자겸과 척준경은 남은 무리와 병졸들을 이끌고 궁성을 포위한 후 불을 지르고, 반대파를 색출 처벌한다며 많은 사람들을 살해합니다. 이에 두려워진 인종은 글을 지어 이자겸에게 왕위를 넘기려고 합니다. 그러나 양부(兩府)의 반대와 이자겸의 횡포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인주 이씨들 일부와 귀족 관료인 김부식(金富軾) 등의 반대로 저지되지요.

하지만 이 사건을 빌미로 이자겸은 인종을 자기 집에 가두고 국사를 제멋대로 처리하였다고 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군신 관계를 요구해 온 금나라에 대해 모든 신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것은 이자겸 스스로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결정이었습니다. 또한 인종을 죽이기 위해 여러 차례 독살하려 하였지만, 그때마다 왕비의 기지로 왕은 겨우 화를 면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인종은 다시 한 번 치밀한 반전을 계획합니다. 이자겸과 척준경 사이에 틈이 벌어진 것을 알게 된 인종은 내의(內醫) 최사전(崔思全)에게 밀명(密命)내려 척준경으로 하여금 이자겸의 손에서 벗어나 왕에게 충성할 것을 요구합니다. 결국 척준경의 마음이 왕에게 돌아서게 되고, 인종은 결정적인 순간을 기다려 척준경과 이공수로 하여금 이자겸과 그 일당들을 체포하게 함으로써 이자겸의 난은 끝이 납니다.

이자겸과 부인 최씨는 아들 이지윤과 함께 영광으로 유배되었으며, 이자겸의 딸들은 문종의 왕비에서 폐위 당하고, 인주 이씨 가문은 정치적으로 몰락하고 맙니다. 이자겸은 같은 해인 1126년(문종4) 12월 유배지인 영광에서 죽습니다.

인종은 후에 그를 검교태사(檢校太師)·한양공(漢陽公)으로 추증하고 부인 최씨는 변한국대부인(卞韓國 大夫人)으로 책봉하여 친족의 애를 표현하고자 했답니다.

인예순덕태후(仁睿順德太后)

인예순덕태후(仁睿順德太后))

세 임금과 대각국사 의천의 어머니, 경원이라는 이름을 얻다.
고려 제11대 문종의 비 인예순덕태후는 인주 이씨로, 문종 때 가장 강력한 권세가였던 중서령 이자연(李子淵)의 첫째 딸입니다. 문종의 또다른 왕비인 인경현비(仁敬賢妃)와 인절현비(仁節賢妃)도 모두 인예순덕태후의 여동생입니다. 문종과의 사이에서 제12대 임금 순종, 제13대 선종, 제 15대 숙종과 대각국사 의천 등 13왕자와 6공주를 낳아 고려 왕실에서 가장 큰 어머니이자 할머니로서 각인되었답니다.

그녀는 문종과 혼인하여 처음에는 연덕궁주(延德宮主)에 봉해졌다가 1047년(문종원년) 12월에 아들 왕휴(王烋 : 순종)를 낳았고, 1049년(문종3)에는 아들 왕증(王烝 : 선종)을 낳았으며, 1052년(문종6)에 왕비로 책봉되어 ‘인예왕후’가 되었습니다.

1086년(선종 3) 왕태후가 되어 선종을 도와 왕실의 가장 큰 어른으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하였습니다. 인예순덕태후는 1092(선종9)년 9월에 서경에서 죽어 대릉(戴陵)에 장사지냈다고 합니다. 시호는 ‘인예’인데, 1140년(인종18)에 성선(聖善), 1253년(고종40)에 효목(孝穆)이라는 시호가 더해졌습니다. 한편 제15대 숙종 임금은 당시 수주(지금의 부평)의 임내였던 소성(인천)을 자신의 어머니인 인예순덕태후의 내향이라고 해서 ‘경사와 기쁨의 근원이 되는 땅’이라며 경원(경원)군으로 승격시켰답니다.

이자겸(李資謙)

이자겸(李資謙)

인종의 외할아버지이자 장인, 고려 왕실을 주무른 권력자
이자겸(李資謙 ?~1126)은 중서령(中書令) 이자연의 손자이자, 경원백(慶源伯) 이호(李顥)의 첫째 아들입니다. 여동생은 순종의 제3비였다가 순종이 죽은 후에 외국에 거하면서 노비와 간통한 것이 드러나 폐위된 장경궁주랍니다.

이자겸은 집안의 힘으로 관직에 나아가, 국가의식과 행사를 주관하는 정7품의 합문지후(閤門祗候)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장경궁주의 간통사건과 연좌되어 해임되었다가, 그의 딸이 예종과 혼인하여 연덕궁주(延德宮主)가 되면서 다시 일어서게 됩니다. 연덕궁주가 1,109년(예종4)에 친정집에서 예종의 맏아들을 낳았고, 1,114년(예종9)에는 왕비로 책봉됨으로써 이자겸의 힘은 더욱 커집니다.

1122년(예종17) 예종이 죽고 12살의 어린 왕자가 이자겸의 보필에 힘입어 즉위하니 그가 고려 제17대 인종(仁宗)입니다. 외손자인 인종의 왕권을 지키기 위해 왕권을 넘보는 예종의 동생들을 제압하면서, 이자겸의 정치적 위상은 더욱 높아지고, 조정의 모든 권력은 이자겸에게 집중됩니다.

이자겸은 또 자신의 권력을 더 강화하기 위해 자신의 셋째 딸을 인종의 왕비로 들여보내고, 얼마 뒤에는 넷째 딸마저도 인종의 왕비가 되게 합니다. 이렇게 되면 어머니의 동생들을 왕비로 맞게 되는 것이므로 인륜에 어긋나는 혼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 이외에 누구도 왕 주변에서 권력을 만들 수 없도록 하겠다는 이자겸의 뜻을 인종 임금은 물론 누구도 막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이자겸은 왕의 칭호만 없을 뿐 왕을 주무르면서 왕보다 더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습니다.

이와 같은 전횡은 인종임금으로 하여금 하루빨리 이자겸의 손아귀로부터 벗어나고픈 열망을 갖게 합니다. 1126년(인종4) 2월 왕은 이자겸 세력을 제거하려는 거사에 나서게 됩니다. 이를 위해서는 이자겸의 사돈이자 군사적 실세인 척준경(拓俊京) 일파를 먼저 제거해야 했습니다. 이들은 약속된 날 밤에 군사를 거느리고 궁궐로 들어가, 우선 척준경의 동생인 병부상서 척준신(拓俊臣)과 아들인 내시 척순(拓純) 등을 살해하게 됩니다. 변란을 알게 된 이자겸과 척준경은 남은 무리와 병졸들을 이끌고 궁성을 포위한 후 불을 지르고, 반대파를 색출 처벌한다며 많은 사람들을 살해합니다. 이에 두려워진 인종은 글을 지어 이자겸에게 왕위를 넘기려고 합니다. 그러나 양부(兩府)의 반대와 이자겸의 횡포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인주 이씨들 일부와 귀족 관료인 김부식(金富軾) 등의 반대로 저지되지요.

하지만 이 사건을 빌미로 이자겸은 인종을 자기 집에 가두고 국사를 제멋대로 처리하였다고 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군신 관계를 요구해 온 금나라에 대해 모든 신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것은 이자겸 스스로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결정이었습니다. 또한 인종을 죽이기 위해 여러 차례 독살하려 하였지만, 그때마다 왕비의 기지로 왕은 겨우 화를 면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인종은 다시 한 번 치밀한 반전을 계획합니다. 이자겸과 척준경 사이에 틈이 벌어진 것을 알게 된 인종은 내의(內醫) 최사전(崔思全)에게 밀명(密命)내려 척준경으로 하여금 이자겸의 손에서 벗어나 왕에게 충성할 것을 요구합니다. 결국 척준경의 마음이 왕에게 돌아서게 되고, 인종은 결정적인 순간을 기다려 척준경과 이공수로 하여금 이자겸과 그 일당들을 체포하게 함으로써 이자겸의 난은 끝이납니다.

이자겸과 부인 최씨는 아들 이지윤과 함께 영광으로 유배되었으며, 이자겸의 딸들은 문종의 왕비에서 폐위 당하고, 인주 이씨 가문은 정치적으로 몰락하고 맙니다. 이자겸은 같은 해인 1126년(문종4) 12월 유배지인 영광에서 죽습니다.

인종은 후에 그를 검교태사(檢校太師)·한양공(漢陽公)으로 추증하고 부인 최씨는 변한국대부인(卞韓國 大夫人)으로 책봉하여 친족의 애를 표현하고자 했답니다.

쌍명재 이인로(李仁老)

원인재에 위치한 이인로 선생의 문학비

쌍명재 이인로(李仁老)

시와 서평의 길을 연 고려 무신 정권기의 문인
인주 이씨인 이인로(李仁老, 1152~1220, 의종6~고종7)는 고려 무신정권기 전후의 문신이자 문인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시집이라고 할 수 있는 《파한집》으로 유명한 시인이지요. 초명은 득옥(得玉 ). 자는 미수(眉叟), 호는 쌍명재(雙明齋)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고아가 되었지만,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시문과 글씨에 뛰어난 그를 화엄승통(華嚴僧 統)인 요일(寥一)이 거두어 양육하고 공부를 시켜서 유교의 경전들과 제자백가서를 두루 섭렵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의종 24년(1170)에 이의방, 이고, 정중부가 무신란을 일으키며 문관들에 대한 잔혹한 복수극을 자행하자, 이인로는 피신하여 불가에 귀의합니다. 그때가 이인로의 나이 19세였지요. 25세에는 환속하여 태학에 들어가 육경(六經)을 배웠고, 1180년(명종 10) 29세 때에는 진사과에 장원급제함으로써 그의 명성이 자자하게 되었습니다.

31세 때인 1182년, 금나라 하정사행(賀正使行)에 서장관(書狀官)으로 수행하였고, 다음해 귀국하여 계양군(桂陽郡, 지금의 인천 부평) 서기로 일하였습니다. 그 뒤 문극겸(文克謙)의 천거로 한림원에 보직되어 사소(詞疏)를 담당하였고, 그 후 한림원에서 고원(誥院)에 이르기까지 14년간 조칙(詔勅)을 짓는 일을 주로 했다고 합니다. 이 기간 동안 바쁜 중에도 틈틈이 시사(詩詞)를 지어 주변으로부터 '복고( 腹藁)'라며 칭찬을 받게 됩니다. 이후 벼슬은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郎)과 비서감우간의대부(�書監右諫 議大夫)까지 역임하였다고 합니다.

이 시기에 이인로는 임춘(林椿) · 오세재(吳世才) 등과 '죽림고회(竹林高會)'를 열고 함께 활동하며 시를 짓고, 문학을 즐겼다고 합니다. ‘죽림고회’는 이인로, 임춘(林 椿), 오세재(吳世才), 조 통(趙通), 황보항(皇 甫抗), 이담지(李湛之), 함순(咸淳) 등 일곱 사람이 망년(望年)의 벗이 되어 시와 술 그리고 차(茶)로 즐겨 ‘죽림칠현(江左七賢)’에 비유해 만들어진 이름입니다.

문학적 감수성과 능력은 뛰어났으나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고민을 많이 한 것으로 보이는 이인로는 《 은대집(銀臺集)》, 《쌍명재집》, 《파한집》, 등을 남겼지만 《파한집》만이 전하고 있습니다. ‘심심풀이 파적( 破寂)감으로 쓴 것’을 모은 책이라는 뜻의 《파한집》은 선현들의 명문장이나 수려한 문구(秀句)를 채록하고, 당시 ‘죽림고회’에서 함께 나누었던 시화나 문담을 자신의 자작시를 중심으로 수록한 것입니다. 최자(崔滋)의 《보한집(補閑集)》과 아울러 시평(詩評)을 곁들인 우리나라 최초의 시화(詩話)로 문학사적 가치가 매우 높습니다.

이인로가 죽은 지 40년 만인 고려 원종 원년(1260)에 그의 서자 이세황(李世黃)이 기장(機張)에서 간행하였는데, 고려시대의 각판 잔존본(刻板殘存本)으로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김민선(金敏善) 장군

김민선 장순의 안관당이 있었던 문학산 정상 (출처 : 조선일보)

김민선(金敏善) 장군

왜군으로부터 인천을 지켜낸 지도자
김민선(1542~1592)은 광주(光州) 김씨로, 1542년(중종 37)에 경기도 부평 도호부 지역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김상겸(金尙謙), 할아버지는 김석경(金碩卿), 증조할아버지는 김한수(金漢秀 )이고, 어머니는 정건(鄭鍵)의 딸입니다. 자는 달부(達夫)입니다.

1564년(명종 19) 식년시에서 급제하여 생원이 되었고, 1572년(선조 5)에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집의( 執義)가 되었습니다. 1581년(선조 14)에 경성(鏡城) 판관(判官)의 직책을 고의로 버리려고 그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았다 하여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습다. 그후 1591년(선조 24)에는 헌납(獻納)에 제수되었습니다. 헌납으로 재직하면서 사간원과 사헌부가 함께 정철(鄭澈)을 탄핵하는 데에 참여하여 정철, 백유함(白惟咸), 유공진(柳拱辰), 이춘영(李春英) 등을 유배시키는데 일조하게 됩니다.

김민선은 1592년(선조 25) 인천 도호부사로 부임하여 문학 산성(文鶴山城)을 수축하고, 군량을 모으는 등 일본의 침입에 대비합니다. 전쟁이 나자 인천 각지와 부평, 김포 등지에 격문을 띄워 의병을 모집하고, 방어선을 구축하는 등 인천 사수의 결의를 다지지요.

계양산성을 점령한 일본군의 일부는 1592년 5월 20일 인천에 침략하였습니다. 그러나 김민선(金敏善) 인천 부사가 만반의 방어 태세를 갖추어 안대평(安垈坪: 지금의 간석동)에서 일본군을 격퇴시키지요. 이로 인해 지금의 간석역 앞 하천의 다리를 일본군이 패전하여 흩어진 곳이라 하여 왜산교(倭散橋)라 불러 오게 되었지요.

한편 패배한 일본군은 다시 군사를 갖추어 침공하였습니다. 문학산 정상 동편인 수리봉에 성을 쌓고 수차례 공격하였지만, 김민선은 이에 맞서 백성을 이끌면서 문학산성을 잘 사수하였습니다. 하지만 김민선 부사는 전투에 너무 노심초사한 탓으로 과로가 겹쳐 병을 얻고 쓰러졌으며, 끝내 회생하지 못하고 순국(殉國)하였답니다.

선조는 김민선 장군이 임진왜란에 참전하여 왜적을 무찌른 전공을 가상히 여겨 도승지에 추증하였으며, 인천 주민들은 문학산 정상에 안관당(安官堂)이라는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냈습니다. 인천도호부 주변 마을 사람들이 매년 두 번씩 제사를 올리는 가운데 문학산 정상과 안관당은 인천의 정신적인 구심점 역할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는 안관당이 불타 버리게 되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관당제를 유지해 왔으나 문학산 정상에 공군부대가 주둔하면서 그 명맥이 끊기고 말았습니다.

이홍재(李洪載)

길마산 부근의 부평 이씨 정량공파 묘역

이홍재(李洪載)

부평 이씨 정랑공파의 중시조
선학동 산 61번지 길마산 남쪽 기슭에는 부평 이씨 정랑공파의 묘역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이곳은 조선시대 인조임금과 효종 임금 때의 무인이자 병조정랑을 지낸 이홍재(1604~1654)를 중시조로 한 정랑공파의 후손들이 안장되어 있습니다. 이 묘역을 중심으로 부평 이씨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이 마을 이름도 ‘능안말’이라고 불러왔답니다.

이홍재는 갑진년인 1604년(선조37)에 인천에서 태어났습니다. 자는 중거(重車)이지요. 이홍재는 진사시에 합격하여 세마(洗馬)가 되고 1638년(인조16) 무인정시(戊寅庭試) 을과(乙科)에 급제하여 병조정랑(兵曹正郞)에 올랐고, 이어서 성균관(成均館) 사예(司藝)를 마지막으로 벼슬길에서 물러났습니다. 이홍재는 1654년(효종5)에 51세를 일기로 병사하여 자손들에 의해 이곳에 묻혔답니다. 배위는 증정부인(贈貞夫人) 김해 허씨로 부총관(副摠管) 정식(廷式)의 딸입니다.

이홍재의 할아버지는 이조참판을 지낸 이계록(李繼祿)인데, 그 또한 辛卯式年 甲科에 3등으로 급제하여 탐화랑(探花郞)으로 벼슬길을 시작한 사람입니다. 이홍재의 아버지는 도승지를 지낸 이덕일(李德一)로 1585년(선조22)에 기축 증광사마시(增廣司馬試)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1606년(선조39)에 병오증광별(丙午增廣別) 乙科에 급제한 인물입니다. 그의 동생 이상재(李尙載)와 이광재(李光載)도 계유식년 병과와 임오식년 을과로 급제하여 삼형제가 나란히 벼슬길에 올랐습니다.

한편 이홍재의 장남 이세익(世翊)은 庚寅卽位 增廣 丙科로 급제하여 후에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嘉善大夫 吏曹參判 兼同知義禁府事 五衛都摠府 副摠管)이 되었답니다. 이처럼 이홍재의 집안은 할아버지에서부터 아들 대에 이르기까지 4대에 걸쳐 모두 여섯 사람이 대과에 급제한 가문이 되었답니다. 조부인 이계록의 묘는 경기도 개풍군 장단 선영에 있고, 나머지 다섯 사람은 인천광역시 선학동 부평 이씨 묘역에 이홍재와 함께 안장되어 있습니다.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길 없으나 부평 이씨 묘역 입구에는 하마비(下馬碑)가 세워져 있었다고 합니다.

정시성(鄭始成)

청량산 중턱의 정시성 선생의 묘소

정시성(鄭始成)

호랑이를 구해준 소년, 강원도 관찰사 되다
정시성(鄭始成 1608~1686)은 영일 정씨 승지공파 3세손으로 1608년(광해군1)에 태어나 1686년(숙종12)에 사망한 문신으로, 자는 집경(集卿), 호는 만의당(晩依堂)입니다. 증의정부좌참찬(贈議政 府左參贊) 정용(鄭涌)의 장남이며, 조부는 영일정씨 승지공파의 중시조가 된 정여온(鄭汝溫)입니다. 정시성은 어렸을 때 가시가 목에 걸려 괴로워 하는 호랑이를 구해주었고, 그로 인해 혁혁하게 되었다는 전설을 가진 인물입니다.

1633년(인조 11) 식년시 진사 1등 2위로 합격하여 관직의 길을 열고 1639년(인조 17)에는 별시 을과 1위로 급제했답니다. 검열, 봉교, 전적(典籍)등을 지내고, 길주 목사 등 여러 곳의 지방관을 거쳤으며, 형조 참의, 승정원 동부승지, 호조 참의, 강원 감사, 예조 참의 등을 역임했습니다. 1650년(효종 1) 지평으로 있을 때, 무고로 체직당한 바가 있으며, 1668년(현종 9)에는 장령으로서 황장목(黃場木)을 무단으로 벌목한 안동 부사 권집(權�)과, 외척 오정위(吳挺緯), 이찬한(李燦漢) 등을 탄핵해 체직시킨 적도 있습니다. 그 밖에 언관으로서 대동법 시행 후, 민간에 유청지지(油淸紙地) 값을 횡령하는 폐단을 논하는 등 활발한 언론활동을 했답니다.

1680년(숙종 6) 승지로 승진하였고, 이듬해 강원도관찰사로 나가 관내 피해상황과 이에 따른 진휼 방안을 건의하였습니다. 이 후 승지 등을 지냈고, 사후에 이조 판서로 추증되었습니다. 묘소는 청량산 중턱에 있습니다.

정수기(鄭壽期)

청량산 중턱 영일정씨 묘역의 정수기 선생 묘소

정수기(鄭壽期)

영의정에 추증된 우의정과 좌의정의 아버지.
영일 정씨 승지공파 5세손인 정수기는 강원도 관찰사를 지낸 정시성(鄭始成)의 손자이자, 정인빈(鄭寅賓)의 아들로 1664년(현종 1)에 태어났습니다. 자는 순년(舜年), 호는 곡구(谷口)입니다. 영조 때 우의정을 역임한 정우량(鄭羽良)과 좌의정을 지낸 정휘량(鄭翬良)의 아버지랍니다.

1699년(숙종 25) 36세 되던 해에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에 9위로 급제하였으며, 1713년 세자시강원 사서에 임용되었습니다. 1722년 사간원 정언으로서 경종(景宗)의 대리청정을 주청한 김춘택 등을 탄핵한 것으로 인해 1725년(영조 1) 신임사화의 주동 인물로 탄핵되어 강현(姜鋧)·이조(李肇) 등과 함께 벼슬과 품계를 빼앗기고 제명되었습니다.

1727년(영조 3) 대사간으로 복직되었으며, 후에 승정원 승지·대사성·대사간·공조 참판 등을 역임하고, 1734년 개성 유수로 나갔다가 1736년에 다시 대사헌으로 임용되어 지돈령부사· 우참찬 · 예조 판서 등을 거쳐 기로당상(耆老堂上)에 올랐습니다. 성격이 강직하여 권세에 아부하지 않았으며 서슴없이 직언하는 곧은 선비의 대명사였습니다. 1752년(영조 28) 사망하였으며, 1753년 영의정에 추증되었습니다.

조태억과 권첨, 정수기, 이조 등이 부평에서 만나 나흘간 함께 지내며 수십 편의 시를 지었고, 후에 이것을 첩으로 제작한 것이 조태억(趙泰億)의 『계양수창첩(桂陽酬唱帖)』인데 여기에 정수기의 시가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정수기의 묘는 청량산 영일정씨 묘역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정우량[鄭羽良]

정우량 선생의 영정

정우량[鄭羽良]

병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오른 학남대감
영일 정씨 승지공파 6세손인 정우량은 1692(숙종 18) 판서 정수기와 파평 윤씨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강원도관찰사 정시성의 증손이고, 할아버지는 정인빈입니다. 자는 자휘(子翬), 호는 학남(鶴南). 시호는 문충(文忠)입니다. 영조 때 좌의정이었던 휘량(翬良)의 형입니다.

1723년(경종 3)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관직으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1727년 정언이 되어 당시 백성들을 효유(曉諭)하는 왕의 교서를 한글로 번역하여 각도에 반포하였습니다. 부수찬으로 시독관(侍讀官)을 겸임할 때 왕에게 이황(李滉)과 이이(李珥)의 문집을 출판할 것을 주청하여 간행하도록 하기도 했습니다.

지평·대사성을 역임하고 좌승지 때에는 공종수(孔宗洙)를 선성(先聖)의 후예로 추대하고 반궁(泮宮)에 두어 녹(祿)을 지급할 것을 소청하여 시행하기도 했습니다. 이조참판 당시 민통수(閔通洙)와 사이가 좋지 못하여 이천부사로 좌천되기도 했으나 우참찬이 된 뒤에는 한성부에 있는 서북인을 등용하여 인심을 수습할 것을 주청하였습니다.

1749년(영조 25) 병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올랐으며 그 뒤 판중추부사가 되었습니다. 1754년(영조 30)에 사망했고, 묘는 현재 아버지 정수기, 동생 정휘량과 함께 영일정씨 묘역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글씨에 능하여 작품으로 개성계성사비문(開城啓聖祠碑文)을 남겼습니다.

정휘량(鄭翬良)

정휘량 선생의 묘소

정휘량(鄭翬良)

이조판서, 병조판서, 우의정 거쳐 좌의정까지
조선 영조 임금 때 좌의정을 지낸 정휘량(1706~1762)은 영일 정씨 승지공파 5세손인 아버지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정수기와 어머니인 파평 윤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자는 자우(子羽), 사서(士瑞), 호는 남애(南崖)입니다. 우의정을 지낸 정우량의 동생이며, 할아버지는 정인빈, 증조할아버지는 강원도관찰사 정시성이지요.

1733년(영조 9)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1737년(영조 13) 별시 문과에 을과 2위로 급제하여 중앙 관직에 나아갑니다. 시독관,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 등을 지낸 후 1756년(영조 32)에 홍문관 제학을 거쳐 대제학에 오릅니다. 이후 호조판서, 공조판서, 이조판서, 병조판서를 두루 역임하고, 평안도 관찰사(平安道 觀察使)를 지낸 후 1761년(영조 37)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이 됩니다.

정휘량은 당시에 소론(少論)의 제거를 주장하면서, 소론의 영수들을 공격하는데 앞장섰던 대표적인 인물 중 한 사람입니다. 소론의 영수였던 조태구·유봉휘 등을 역적으로 몰아 노비가 되도록 할 것과, 이광좌(李光佐)·최석항(崔錫恒) 등의 관직을 박탈하도록 청하였답니다. 자신은 그후 곧바로 사직하여,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의 한직으로 전직하여 말년을 지낸답니다.

정휘량이 정승까지 오르는 과정에는 붕당의 폐단을 없애려는 영조의 탕평책이 시행되는 가운데 적절한 운신과 조문명(趙文命), 조현명(趙顯命) 등의 후원이 컸습니다. 또한 조카인 정치달과 그의 처인 화완 옹주의 도움도 있었답니다.

정휘량은 1762(영조38)에 사망했고, 묘는 동춘동 영일정씨 묘역에 위치하고 있습니다.『남애집(南崖集)』이라는 문집과 『견사록(見思錄)』이라는 저서를 남겼습니다.

연수문화원.

인천광역시 연수구 비류대로 299 (청학동, 청학문화센터) 2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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