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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겸(李資謙)
연수문화원
2015-08-01 10:57:51

인종의 외할아버지이자 장인, 고려 왕실을 주무른 권력자

 

이자겸(李資謙)

 

 

이자겸(李資謙 ?~1126)은 중서령(中書令) 이자연의 손자이자, 경원백(慶源伯) 이호(李顥)의 첫째 아들입니다. 여동생은 순종의 제3비였다가 순종이 죽은 후에 외국에 거하면서 노비와 간통한 것이 드러나 폐위된 장경궁주랍니다.

 

이자겸은 집안의 힘으로 관직에 나아가, 국가의식과 행사를 주관하는 정7품의 합문지후(閤門祗候)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장경궁주의 간통사건과 연좌되어 해임되었다가, 그의 딸이 예종과 혼인하여 연덕궁주(延德宮主)가 되면서 다시 일어서게 됩니다. 연덕궁주가 1,109년(예종4)에 친정집에서 예종의 맏아들을 낳았고, 1,114년(예종9)에는 왕비로 책봉됨으로써 이자겸의 힘은 더욱 커집니다.

 

1122년(예종17) 예종이 죽고 12살의 어린 왕자가 이자겸의 보필에 힘입어 즉위하니 그가 고려 제17대 인종(仁宗)입니다. 외손자인 인종의 왕권을 지키기 위해 왕권을 넘보는 예종의 동생들을 제압하면서, 이자겸의 정치적 위상은 더욱 높아지고, 조정의 모든 권력은 이자겸에게 집중됩니다.

 

이자겸은 또 자신의 권력을 더 강화하기 위해 자신의 셋째 딸을 인종의 왕비로 들여보내고, 얼마 뒤에는 넷째 딸마저도 인종의 왕비가 되게 합니다. 이렇게 되면 어머니의 동생들을 왕비로 맞게 되는 것이므로 인륜에 어긋나는 혼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 이외에 누구도 왕 주변에서 권력을 만들 수 없도록 하겠다는 이자겸의 뜻을 인종 임금은 물론 누구도 막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이자겸은 왕의 칭호만 없을 뿐 왕을 주무르면서 왕보다 더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습니다.

 

이와 같은 전횡은 인종임금으로 하여금 하루빨리 이자겸의 손아귀로부터 벗어나고픈 열망을 갖게 합니다. 1126년(인종4) 2월 왕은 이자겸 세력을 제거하려는 거사에 나서게 됩니다. 이를 위해서는 이자겸의 사돈이자 군사적 실세인 척준경(拓俊京) 일파를 먼저 제거해야 했습니다. 이들은 약속된 날 밤에 군사를 거느리고 궁궐로 들어가, 우선 척준경의 동생인 병부상서 척준신(拓俊臣)과 아들인 내시 척순(拓純) 등을 살해하게 됩니다. 변란을 알게 된 이자겸과 척준경은 남은 무리와 병졸들을 이끌고 궁성을 포위한 후 불을 지르고, 반대파를 색출 처벌한다며 많은 사람들을 살해합니다. 이에 두려워진 인종은 글을 지어 이자겸에게 왕위를 넘기려고 합니다. 그러나 양부(兩府)의 반대와 이자겸의 횡포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인주 이씨들 일부와 귀족 관료인 김부식(金富軾) 등의 반대로 저지되지요.

 

하지만 이 사건을 빌미로 이자겸은 인종을 자기 집에 가두고 국사를 제멋대로 처리하였다고 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군신 관계를 요구해 온 금나라에 대해 모든 신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것은 이자겸 스스로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결정이었습니다. 또한 인종을 죽이기 위해 여러 차례 독살하려 하였지만, 그때마다 왕비의 기지로 왕은 겨우 화를 면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인종은 다시 한 번 치밀한 반전을 계획합니다. 이자겸과 척준경 사이에 틈이 벌어진 것을 알게 된 인종은 내의(內醫) 최사전(崔思全)에게 밀명(密命)내려 척준경으로 하여금 이자겸의 손에서 벗어나 왕에게 충성할 것을 요구합니다. 결국 척준경의 마음이 왕에게 돌아서게 되고, 인종은 결정적인 순간을 기다려 척준경과 이공수로 하여금 이자겸과 그 일당들을 체포하게 함으로써 이자겸의 난은 끝이 납니다.

 

이자겸과 부인 최씨는 아들 이지윤과 함께 영광으로 유배되었으며, 이자겸의 딸들은 문종의 왕비에서 폐위 당하고, 인주 이씨 가문은 정치적으로 몰락하고 맙니다. 이자겸은 같은 해인 1126년(문종4) 12월 유배지인 영광에서 죽습니다.

 

인종은 후에 그를 검교태사(檢校太師)·한양공(漢陽公)으로 추증하고 부인 최씨는 변한국대부인(卞韓國大夫人)으로 책봉하여 친족의 애를 표현하고자 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