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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류백제와 미추홀
연수문화원
2015-06-15 14:22:00

문학산 정상일대는 비류왕이 세웠다는 비류백제(일명 미추홀왕국)의 도읍지라고 전해지고 있다. 사기를 보면 비류왕이 문학산 정상에 성을 축조하고 이 성을 방패삼아 비류백제를 세우고 도읍을 정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비류와 온조는 고구려를 건국한 고주몽(동명성왕)의 아들이다.
고주몽은 고구려를 세우기전 북부여에서 쫒겨나 졸본부여로 밀려왔다가 졸본부여왕의 신임을 받게 된다. 졸본부여왕의 둘째딸 소서노와 결혼해 두 아들을 낳았으니 그들이 비류와 온조이다. 
졸본부여왕은 왕위를 고주몽에게 물려주었다. 왕위를 이어받은 고주몽은 고구려를 세웠는데, 고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 유리가 찾아오게 된다. 고주몽이 유리를 태자로 책봉해 왕위를 계승하게 하려고 하자 비류는 동생 온조와 어머니 소서노를 데리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기 위해 남쪽으로 향하게 된다.
남쪽으로 향하는 비류, 온조를 따르는 무리들은 제법 많았다 한다. 무리가 한산(漢山:북한산 추정)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嶽:북악산 추청)에 올라 살 만한 곳을 살펴보았다. 비류는 서쪽해안가가 마음에 들었다. 그러자 신하들은 “이 하남의 땅은 북으로 한강을 끼고 동으로 높은 산에 의지하며, 남쪽으로 기름진 평야를 바라보고, 서쪽으로 바다로 가로막혀 군사적으로나 지정학적으로나 쉽게 얻기 어려운 형세이니 이곳에 도읍을 정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비류는 그 말을 듣지 않고 미추홀로 와서 살게 되었고 온조는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해 십제(十濟)라고 나라 이름을 정했다. 그후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히 살 수 없었다. 비류가 위례성에 돌아와서 보니 도읍이 안정되고 백성들이 편하게 살고 있었으므로 참회하고 죽었다. 비류의 미추홀 백성들이 모두 위례성에 모이게 되자 온조는 나라이름을 백제로 고쳤다. 이상은 삼국사기의 백제 건국설화를 요약한 것이다.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비류가 굳이 문학산 일대에 왕국을 세운 이유에 대해서는 많은 사학자들이 지형적인 조건을 꼽는다. 삼면이 바다이고 갯벌이 발달해 수산물이 풍부했을 뿐 아니라 식량 저장의 수단인 소금을 쉽게 확보할 수 있다는 점, 문학산이 외부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는 천연 요새의 기능을 한다는 점, 더욱이 바닷길만 열리면 한반도 해안은 물론 중국과 자유로운 교역이 가능하다는 점에 비류가 이끌렸을 것이라고 예측하는 것이다. 즉, 문학산 일대는 농경이 발달하지 못했던 당시에 자원의 보고이자 천혜의 요새이며, 대륙으로 통하는 해상교통의 요지였으리란 것이다.

그러나 결국 비류왕국은 몰락의 길을 걷고 온조 백제에 통합되고 말았다. 위에서 열거한 지형적 조건이 여러 가지로 유리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성읍국가 수준의 비류왕국이 고대국가로 성장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조건, 즉 농경을 발전시킬 만한 여건이 갖춰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학산 일대엔 농경지로 활옹할 만한 평지가 부족했고 그나마 있는 땅도 척박했다. 따라서 한강 이남의 옥토에서 번창한 온조백제를 이겨낼 수 없었던 것이다.

한편 비류가 문학산 일대에 왕국을 건설한 것에 대해 일각에서는 광활한 만주벌판과 중국대륙의 서북지역을 되찾겠다는 의지였을 것이라는 새로운 해석을 제시해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들은 고구려를 떠나온 비류가 산동반도와 발해만, 요동반도, 한반도를 잇는 서해바다를 중심으로 해상왕국을 건설하려 했을 것이라고 한다. 이에서 더 나아가 비류백제가 단지 문학산 일대에 세워진 왕국이 아닌 중국 산동반도에서 한반도 한강 유역에 이르는 거대한 왕국이었을 것이라는 설을 제시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이같은 설을 객관적으로 입증할 만한 증거는 아직 충분하지 않다. 다만 좀더 깊이 연구되어 이후 학문적 성과로 이어지기를 기대한다.